교육정책이 사회적 난제에 빠졌을 때 우선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정책의 시작이 어떤 의도였는지, 얻고자 한 것과 바꿔가고자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 목적을 명확히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고교학점제는 단순한 학사 행정의 변화나 ‘단위’에서 ‘학점’으로의 기계적 변경이 아닌, 입시라는 협소한 목표에 종속되어 주입식·암기식 수업과 문제 풀이로 점철된 고교 교육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한 ‘마중물’로서, 획일적인 교육과정과 한 줄 세우기식 평가 구조에 균열을 내고 학생 개개인이 자신의 진로와 적성에 따라 과목을 선택하여 스스로 배움의 주체로 서게 하는 것이 정책의 시작이자 목표였습니다.
또한 해당 정책은 일관된 교육 패러다임 아래서 필연적으로 성취평가제(절대평가) 도입, 자사고·특목고의 일반고 전환 정책, 2022 개정 교육과정, 2028 대입 개편과 함께 하나의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추진되었습니다. 성취평가제는 옆 친구를 밟고 일어서야 하는 상대평가의 비교육적 경쟁을 멈추고, 학생이 성취 기준에 도달했는지를 확인하여 진정한 과목 선택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평가의 정상화를 위한 필수 조건이었고, 일반고 전환 정책은 고교의 수직적 서열화를 해소하고 모든 학교에서 다양한 교육과정이 운영되는 ‘수평적 다양화’를 이룸으로써 고교학점제가 특정 학교의 전유물이 아닌 보편적 교육 혁신의 도구가 되게 하는 전제였으며, 2022 개정 교육과정과 2028 대입 개편은 이러한 수업과 평가의 혁신이 입시라는 현실의 벽에 부딪혀 좌초되지 않도록 교육과정-수업-평가가 일체화되는 정책 정합성 완성을 위한 최종적인 조각이었습니다. 즉, 고교학점제는 이 모든 조건이 함께 작동할 때 비로소 그 취지를 달성할 수 있는 거대한 교육 개혁의 설계도였습니다.
그러나 고교학점제가 전면 시행된 현 상황에서, 해당 교육정책을 지탱하던 거대한 설계도는 정책 정합성의 붕괴로 인해 그 근간부터 흔들렸습니다. 첫째, 고교학점제의 핵심 전제인 ‘성취평가제(절대평가)’가 2028 대입 개편안에 의해 사실상 무력화되었습니다. 고교학점제는 학생이 진로와 적성에 따라 과목을 선택하고 성취 기준 도달 여부로 평가받는 것을 원칙으로 함에도 교육부는 2028 대입 개편을 통해 고교 내신에 5등급 상대평가 체제를 병기하고 수능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학생들의 과목 선택 기준을 자신의 의사 및 판단보다는 ‘내신 유불리’가 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는 학생들을 배움의 주체로 세워가기보다 ‘입시 최적화 선택’을 강요받는 변별 대상으로 객체화하며 궁극적으로 고교학점제를 ‘무늬만 선택’인 제도로 전락할 위기에 밀어 넣었습니다.
둘째, 고교 서열화 해소를 위한 ‘일반고 전환 정책’이 폐기되었습니다. 지난 2011년 교육부는 ‘성취평가제(절대평가)’ 도입을 천명하였지만 10년이 넘도록 이를 현장에 안착시키지 못했고 그 근본적인 원인으로 서열화된 고교 구조를 제시한 바가 있습니다. 우수한 학생을 선점하는 특목고·국제고·자사고가 엄존하는 상황에서 내신 절대평가가 도입될 경우, 대학은 변별력을 이유로 소위 ‘특권 학교’ 출신 학생들을 선호할 것이고, 이는 고입 단계에서의 사교육 폭증과 고교 쏠림 현상을 가중시킬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고교학점제는 학교 간 격차를 해소하고 모든 학교가 상향 평준화되는 ‘수평적 다양화’를 전제로 설계되었지만 교육부는 자사고·외고·국제고 존치를 결정함으로써 이 전제를 스스로 파기했고 그 결과 정책의 전제 조건들이 하나둘씩 무너진 고교학점제는 여러모로 위태로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고교학점제를 지탱해야 할 학교 내부의 개혁 역량마저 한계점에 봉착했다는 점입니다. 교육부는 학생 맞춤형 교육과 책임교육을 강조하며 화려한 청사진을 제시했지만, 정작 이를 실현해야 할 구체적인 학교 현장은 제도의 이상을 감당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실행 역량과 빈약한 인프라 위에 버겁게 서 있습니다. 학점제가 안착하기 위해서는 소인수 과목 개설과 학생 맞춤형 지도 등을 위해 ‘수업 학급 수’를 기준으로 교사를 배치해야 함이 자명함에도 교육부는 여전히 과거의 낡은 기준인 ‘교사 1인당 학생 수’ 혹은 ‘행정 학급’ 논리에 매몰되어 있고, 현장 교사들은 학생 개개인의 시간표 관리, 이동 수업에 따른 출결 및 생활 지도, 과정 중심 평가와 기록 등 학점제 도입으로 파생된 업무 아래 ‘교육’이 아닌 ‘행정’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최소 성취수준 보장지도(최성보)’는 별도의 인력이나 예산, 공간 지원 없이 오로지 교사의 개별적 노력에만 의존함으로써 교사들이 수업 준비와 연구에 쏟아야 할 에너지를 과도한 행정 처리와 방과 후 보충 지도로 소진하며 극심한 피로감과 무력감을 호소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고교학점제의 기본 전제들이 퇴보하고 현장의 실행 역량이 한계에 부딪힌 상황에서 학교 현장은 교육부와 국교위가 대입 제도 개편과 성취평가제 구현 등에 전향적으로 나서주기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최근 국교위의 판단이나 위원장의 발언 등을 종합할 때, 현 체제가 고교학점제의 본래 목적을 구현하며 시행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기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특히 12월 18일 제63차 국교위 회의 보고에 담긴 고교학점제 후속 조치안은 최소 성취수준 보장지도를 어떻게 현실적으로 운영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에 충분히 답하지 못하고 있어 더욱 큰 상실감을 남겼습니다. 단순히 최성보 운영 방식만을 조정하는 것은, 학교와 교사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책임을 계속해서 떠넘기는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에 국교위 발표에서는 보다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인식과 점검, 그리고 개선 방안이 이뤄져야만 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선, 현행 학교의 교육과정 편제는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 경직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대다수 고교는 졸업 기준인 192학점에 딱 맞춰 192학점을 개설하는 방식을 취함으로서 대학처럼 여유 학점이 있어 한 과목을 미이수(F)해도 다른 과목으로 채워 졸업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닙니다. 고교 현장에서 ‘개설=이수’라는 공식이 강제되는 상황에서, 단 한 과목의 미이수도 곧바로 ‘졸업 탈락’으로 직결될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함으로써, 고교학점제는 학생들에게 실패를 통한 배움의 과정이 아니라,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살벌한 ‘생존 게임’을 조성해 놓았습니다.
둘째, 이러한 구조적 모순은 학교와 교사에게 감당하기 힘든 행정적·교육적 부담을 전가합니다. 미이수생 발생은 곧 졸업 불가라는 파국을 막기 위해, 학교는 필연적으로 보충 지도를 통해 어떻게든 학점을 취득하게 만들어야 하는 압박을 받습니다. 이 과정에서 두 가지 부작용이 발생하는데 하나는 졸업 실패를 막기 위해 평가 기준을 인위적으로 낮추거나 형식적인 보충 수업으로 학점을 부여하는 ‘학점 퍼주기’와 ‘적당주의’의 만연이고, 다른 하나는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방과 후나 방학을 반납하고 미이수 학생들의 개별 지도에 임하여야 하는 교사들의 ‘업무 폭주’입니다.
셋째,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결국 고교학점제를 왜곡시킨다는 점입니다. 미이수가 곧 졸업 실패로 이어질 수 있다는 공포감은 학생들이 자신의 진로와 적성에 맞는 도전적인 과목을 선택하기보다, 이수가 쉽고 성적 받기 유리한 ‘안전한 과목’으로 도피하게 만듭니다. 이는 “자신이 원하는 공부를 한다”라는 고교학점제의 본래 취지를 퇴색시키고, 학교를 ‘안전한 선택’만 횡행하는 보수적인 학습 공간으로 전락시킬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넷째, ‘유급’ 없는 학점제는 한국적 현실과 충돌하며 현장의 혼란을 가중시킵니다. 진정한 의미의 학점제가 작동하려면 미이수 시 재수강을 하거나 학년 진급을 유예하는 ‘유급’ 시스템이 정교하게 갖춰져야 합니다. 그러나 “고등학교 졸업은 무조건 시켜야 한다.”라는 한국 사회의 통념과, “학점을 못 따면 미이수다.”라는 제도의 원칙이 충돌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최성보 조정에 앞서 이러한 모순적 전제를 해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최성보 운영 방식만을 조정하는 것은, 학교와 교사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책임을 계속해서 떠넘기는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최성보와 관련하여 국교위와 교육부가 실제적으로 내놓아야 할 개선 방향은 졸업과 직결된 학점 기준을 일정 부분 완화하여 실패 여지를 열어 주는 것입니다.
동시에 국교위는 행정 예고안으로 “이수 기준은 출석률과 학업성취율 중 하나 이상을 반영하되, 교육활동 및 학습자 특성을 고려하여 설정한다.”라는 내용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러나 고교학점제 이수 기준의 가장 바람직한 방향은 본래 취지에 따라 출석률과 학업성취율 모두를 충족할 때 학점을 인정하는, 원칙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앞서 밝혔듯 해당 과정이 학생들에게 실패가 용납되지 않는 공포가 되지 않도록, 192학점 개설에 192학점 이수라는 경직된 구조 대신 184학점 정도로 졸업 기준을 낮추어 최소한의 실패 여지를 보장해 주는 유연함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고, 교사의 책임교육 못지않게 학생의 책임 있는 교육 참여도 병행되어야 합니다. 필요할 경우 IB(국제 바칼로레아) 교육과정과 같이 ‘일반 졸업’과 ‘이수 인증’을 분리하는 방안도 검토할 수 있습니다. 졸업은 교육과정 참여와 성장의 결과로 보장하되, 과목별 이수와 성취는 별도의 인증 체계로 명확히 구분하는 구조를 도입하여, 최성보는 졸업을 시키기 위한 형식적 통과 의례가 아니라 희망하는 학생에 한하여 확실하게 학습을 지원하는 실질적인 교육적 안전망으로 기능하게 해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적인 여건이 이를 뒷받침하기 어렵다면, 지금은 제도의 형식적 완성을 위해 현장을 쥐어짜기보다 고교학점제의 또 다른 핵심 가치인 ‘과목 선택권 보장’과 ‘질 높은 수업’을 세워가는 것에 역량을 집중하는 것이 차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에 좋은교사운동은 ‘수강신청제’ 모델을 현실적 대안으로 고민할 것을 함께 제안합니다. 이는 출석률을 중심으로 이수 여부를 판단하는 방식입니다. 비록 고교학점제가 내세운 책임교육의 엄격성은 완화되지만, 교사의 업무를 급격히 경감시켜 수업 연구에 집중하게 하고, 평가 기준 완화를 통해 행정적 눈속임이나 민원 발생을 줄이며, 학생에게는 실질적인 선택권을 보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 현장 수용성이 높은 모델입니다. 물론 최성보를 통해 구현하고자 했던 책임교육의 가치는 분명 필요합니다. 그러나 입시 경쟁이 지배하는 풍토와, 초등·중학교 단계에서부터 누적되어 온 학생들의 학습 결손을 고등학교 교사가 방과 후 짬을 내어 해결하라는 것이 요원한 일임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력과 예산, 공간 등 실질적인 지원 없이, 또 학생의 자발성이 전제되지 않은 채 교사의 책임만 강조된 최성보를 강요하는 것은 결국 교사의 소진과 행정적 눈속임만을 낳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실효성 없는 최성보 의무화에 앞서 기존의 ‘기초학력 보장제’를 내실화하여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지도로 보완하되, 장기적으로 제반 토대를 정비하여 책임교육을 재추진하는 ‘숨 고르기’가 필요합니다.
이상을 종합하여 좋은교사운동은 공교육의 붕괴를 막고 고교학점제의 본질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다음과 같이 제안하고자 합니다.
첫째, 고교학점제의 이수 기준은 당초 취지대로 ‘출석률과 학업성취율 동시 충족’ 원칙을 지키되, 졸업 이수 학점을 192학점에서 184학점 내외로 조정하여 학생들에게 구조적인 ‘실패의 여지’를 보장해야 합니다. 나아가 ‘졸업 자격’과 ‘교과 이수 인증’을 분리하는 체계를 도입하여, 최소 성취수준 보장지도가 형식적인 통과 의례가 아닌 학생들의 자발성을 기반으로 실질적 성장을 돕는 교육적 안전망으로 기능하도록 제도를 재설계할 것을 제안합니다.
둘째, 앞서 제안한 방안을 현실적으로 추진하기에 어려움이 있다면 ‘수강신청제’ 모델로의 과감한 전환을 결단해야 합니다. 성취율 미도달 학생을 양산하고 교사를 소진시키는 현재의 구조 대신, 학생에게는 실질적인 ‘과목 선택권’을 보장하고 교사에게는 ‘질 높은 수업’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이는 학점제의 후퇴가 아니라, 제도의 파행을 막기 위한 현실적이고 전략적인 선택입니다.
셋째, 실효성 없는 ‘최소 성취수준 보장지도’의 의무화를 중단하고 ‘숨 고르기’에 들어가야 합니다. 책임교육은 교사의 희생만으로 완성될 수 없습니다. 지금은 무리한 제도를 강행하기보다 기존의 기초학력 보장제를 내실화하고, 고교학점제의 취지와 목적이 작동할 수 있는 구조적 토대를 닦는 데 주력해야 합니다.
넷째, 국가교육위원회와 교육부는 현장의 목소리를 직시하고 정책의 ‘정합성’ 회복에 나서야 합니다. 교육과정과 입시, 평가 제도가 서로 엇박자를 내는 상황에서는 어떤 개혁도 성공할 수 없습니다. 차정인 위원장이 언급한 ‘안정성’이 과거로의 회귀나 현상 유지를 의미해서는 안 됩니다. 진정한 안정성은 제도가 학교 현장에 무리 없이 착근하여 학생의 성장을 실질적으로 돕는 데서 옵니다.
결국 고교학점제의 본질은 학생 개개인이 자신의 적성에 따라 배움의 주체로 서게 하는 교육의 회복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책 당국은 이제 ‘무늬만 학점제’가 되어버린 현실을 직시하고, 고교학점제의 본질적 가치를 지키기 위한 실질적인 제도 개선에 나서기 바랍니다. 나아가 교육정책 간의 정합성을 회복하기 위해 한시 빨리 진정성 있는 결단을 내릴 것을 촉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