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연구·선도학교를 시작으로 도입 8년 차에 접어든 고교학점제는, 학생 개개인의 진로와 적성에 맞는 학습을 통해 미래 사회 역량을 기르는 학생 맞춤형 교육 체제로의 전환이라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시대적 소명을 안고 있다. 초기에는 온라인 공동교육과정까지 포괄하며 다양한 과목 선택권 확대에 주안점을 두었고, 현재는 최소성취수준 보장지도를 통한 ‘학생 맞춤형 책임교육’ 체제 구축으로 나아가며 공교육의 역할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그러나 개탄스럽게도 이러한 고교학점제의 발전 과정은 교육부의 극심한 소통 부재와 철저한 지원 방치 속에 오롯이 학교 현장의 희생과 고군분투에만 내맡겨진 참담한 실정이다.
특히 2022년부터 학교 현장에 적용된 최소성취수준보장 지도는, 그동안 학생 선택의 영역에 머물렀던 보충 지도가 2025학년도부터 필수로 의무화되면서 관련 업무 지원이 충분하지 않은 학교들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짐이 되고 있다. 이는 교육부가 제도의 단계적 도입에 따른 현장 지원과 준비에 얼마나 무성의하고 무책임했는지를 명백히 입증하는 사례이다.
무엇보다 교육부는 정작 고등학교 현장과 동떨어진 AI 디지털 교과서 개발에 혈안이 되어 막대한 혈세를 낭비하면서도, 정작 고교학점제의 근간이 되는 필수 교원 확보, 충분한 예산 지원, 체계적인 연수 프로그램, 현장 맞춤형 프로그램 개발 등에 대해서는 철저히 외면하고 방치해 왔다. 심지어는 시대에 역행하는 대학입시체제 개편안을 내놓음으로써 고교학점제의 핵심 바탕인 성취평가제 또한 왜곡하였다. 이러한 교육부의 파행적인 행태는 고교학점제 도입 초반부터 제기되어 온 현장의 어려움을 극도로 악화시켰고, 고교학점제의 취지에 공감하면서도 현실적 문제 상황을 염려하던 일부 교원단체의 폐지론 주장까지 유발하는 상황을 자초했다.
고교학점제는 해외 선진국에서 오래전부터 시민 양성을 위해 시행하고 있는 제도이며, 모든 학생의 배움을 보장하고 잠재력을 일깨우기 위한 책임교육 제도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 우리의 학교는 교육당국의 미흡한 지원으로 고교학점제 운영의 어려움만이 가중되고 있다. 이제라도 교육부의 전폭적인 지원과 진정성 있는 소통을 통해 고교학점제의 도입 목적 실현을 이뤄가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에 우리는 고교학점제의 정상적인 운영과 성공적인 안착을 위해 교육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전 교육 주체의 이름으로 엄중히 명령하고 강력히 촉구한다.
첫째, 고교학점제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 고교 내신의 완전한 전 과목 절대평가 체제(성취평가제)로 완전 전환하고, 이를 위한 기반을 완벽하게 구축하라. 상대평가 체제는 학생들의 자유로운 과목 선택을 가로막고, 상위권 중심의 경쟁을 심화시켜 자퇴 등 부작용을 초래할 우려가 크다. 특히 2028 대입개편안에서 제시된 성취도와 상대평가 병기 방식은 절충안을 가장하고 있으나, 본질적으로 상대평가의 틀을 벗어나지 못해 고교학점제와의 충돌을 피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진정한 절대평가 체제의 안착을 위해서는 고교 서열화를 조장하는 자사고 및 특수목적고의 일반고 전환과 교사의 평가 전문성 확보도 필수 전제조건이다. 교육당국은 더 이상 성취평가제 전면화를 미룰 것이 아니라, 이를 위한 정책적 기반을 시급히 마련하고, 현장이 절대평가를 제대로 실행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지원에 나서야만 한다.
둘째, 고교학점제와 발맞춰 안정적인 대학입시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수능 전 과목 절대평가를 즉각 도입하라. 2028 대입개편안은 고교학점제의 핵심 가치인 진로에 따른 과목 선택을 완전히 외면한 채, 단순히 과목 간 유불리 논란 회피에만 급급하여 수능 과목을 공통과목으로 통일하고 대부분 과목에 상대평가를 적용하는 교육의 본질을 훼손하는 퇴행적인 안을 강행 발표했다. 이는 고교학점제의 철학과는 동떨어진 ‘한 줄 세우기’식 수능을 강화하는 결과로 치닫고 있으며, 특히 사회와 과학 교과의 경우 고1 공통과목을 수능 범위에 포함시키고 상대평가를 적용함으로써 교육과정 운영에 엇박자를 초래하고 문·이과 간 격차를 심화시킬 것이 불 보듯 뻔하다.
셋째, 고교학점제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교사의 업무 부담을 즉각 실질적으로 감축하고 효율적으로 재구조화하라. 고교학점제 시행으로 교원의 업무 부담이 극도로 가중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육부의 실질적인 경감 노력은 전무했다. 고교학점제 관련 업무를 분석하여 담당자의 수업 시수를 대폭 줄여 업무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고, 출결 및 성적 처리 등 행정 업무 부담을 줄일 수 있는 시스템 개선 및 교사와의 적극적인 소통과 협력이 반드시 단행되어야 한다. 싱가포르 등 해외 사례를 참고하여 교사의 수업과 행정 업무 분리 방안을 즉각 검토하고 도입하라. 지난 8년간 제도를 추진해 왔음에도 나이스 출결 마감 등 사소한 행정 부담을 이유로 폐지론까지 거론되는 현실은 교육부의 무능과 태만을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교육부는 고교학점제 운영에 필수적인 교원 배치와 충원을 즉각 지원하라. 특히 다과목 지도 교사에 대한 지원 방안을 마련하고, 농산어촌 지역의 경우 지역 단위 교원 배치를 통해 학생들이 희망 과목을 이수하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지원해야 한다.
넷째, 고교학점제에 대한 학생과 학부모의 이해도를 높이기 위한 전방위적인 노력을 경주하고 함께 고교학점제 코디네이터 배치를 통한 전문적인 안내 및 상담 시스템을 즉각 구축하라. 학생과 학부모 또한 고교학점제 및 학교 교육과정에 대한 충분한 정보와 상담 기회 부족으로 심각한 혼란을 겪고 있으며, 사교육은 이러한 불안감을 악용하여 상업적인 목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교육부는 고교학점제 도입 초반부터 계획했던 고교학점제 코디네이터 양성 및 학교 배치를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즉각 가시화하고 실행하라. 현재 담당 과목 외 교육과정에 대한 교사의 이해 부족으로 학생 및 학부모 상담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불만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상황에서, 학교 규모를 고려하여 1~2명의 코디네이터를 배치하여 학생의 과목 선택 및 이수를 전문적으로 지원하는 방안은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필수 조건이다. 기획재정부의 예산 제한을 핑계로 필수적인 지원을 미루는 교육부의 변명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기만적인 변명이다. AI 디지털 교과서와 같이 현장과의 괴리가 큰 정책에 무리한 예산을 투입하는 과오는 절대 용납될 수 없다.
고교학점제는 학생의 성장을 지원하고 고교교육의 정상화를 가져올 중 중대한 정책이다. 교육부는 즉시 현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위에 제시한 요구 사항을 전폭적으로 수용하여 고교학점제가 모든 학생의 배움을 보장하는 책임교육 체제가 제대로 안착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