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독일, 영국, 캐나다, 프랑스, 핀란드 등 교육 선진국 어디에도 내신 상대평가제를 시행하는 나라는 없습니다. 시대착오적으로 시행되어 왔던 대한민국의 상대평가제도 마침내 교육부 장관이 제동을 걸었습니다.
지난 9일, 이주호 교육부 장관은 고교 1~3학년 전체 내신성적을 절대평가로 전환하는 방안을 검토하라고 교육부에 지시했습니다. 현재의 고교학점제 추진계획은 2, 3학년에 한하여 절대평가 도입을 예정하고 있지만, 이를 모든 학년에 확대 적용하는 방안을 모색하기로 한 것입니다.
절대평가제로의 전환은 분명 우리 교육이 가야 할 길입니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과 좋은교사운동은 이를 수차례 강조해 왔습니다. 상대평가제가 유발하는 교육 병폐는 너무나 심각해서 더는 방치할 수 없는 상황이며, 이에 대한 절박한 문제의식으로 지난 11월 10일 ‘대입 상대평가 위헌 헌법소원 청구서’를 헌법재판소에 제출하고, 변호사·교사·학부모·학생들이 <상대평가 위헌 선언문>을 잇따라 발표하기도 하였습니다.
상대평가제는 대한민국의 교육 현장을 오랜 기간 왜곡시켜 왔습니다. 평가란 학생 개개인의 성장을 돕고 교수·학습 방법을 개선하는 것이 본연의 목적임에도 상대평가제는 철저히 경쟁을 유발하는 도구로, 자극적 서열화의 기준으로, 승자와 패자를 구분하는 척도로 작동해 왔습니다. 학생들의 배움을 촉진하고 성장을 도와 ‘교육과정-수업-평가’로 교육의 완성을 이뤄야 할 ‘평가’가 오히려 교육과정과 수업 전반을 변질시키는 대한민국 교육의 병폐로 자리 잡았습니다. 마치 우물에 떨어진 독 한 방울이 그 우물 전체를 마실 수 없게 만들어 버린 것처럼, 상대평가제 하나가 대한민국 교육 전반을 왜곡하며 독극물처럼 퍼져 있는 상황입니다.
실제로 2022 개정 교육과정은 “포용성과 창의성을 갖춘 주도적인 사람”으로 우리 학생들을 키워내자고 말합니다. 하지만 개인의 성취가 아닌 다른 사람과의 철저한 비교 속에서 성적이 산출되는 상대평가제는 이미 교실을 사활을 건 전장으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포용성’을 가르치기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영국의 교육학자 켄 로빈슨은 창의성 교육을 위해서는 잘못하거나 실수해도 괜찮다고 여길 수 있는 교육환경이 중요함을 강조했는데, 대한민국 상대평가 구조는 문제 하나에 얻는 것과 잃는 것이 너무나 뚜렷하여, 사실상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평가구조로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창의성’ 교육을 논하기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이로 인한 수업 역시도 요약·정리·암기와 문제풀이의 연속입니다.
문제 상황을 하루빨리 탈피하기 위해서는 이제라도 절대평가제 전환을 통해 교육 시스템 회복의 첫걸음을 떼어야만 합니다. 학생들 간의 비교로 성취를 평하는 기형적 평가제도에서 벗어나, 학생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분명한 기준을 제시하여 그 기준에 따라 성취를 평하는 온전한 평가제도로 전환을 이루어내야 합니다. 절대평가제가 제대로 정착된다면 석차나 등급에만 천착하는 지금과 달리, 과정과 결과를 모두 중시하는 교육환경이 조성될 것이며 교육 목표를 향해 뜻한 과정을 밟아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입니다. 또한 당장의 결과에 집착하지 않으면, 멀리 볼 수 있게 되는 법입니다. 학생들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학생들의 필요를 정확하게 살피고 체계적으로 가르치면서, 학생들의 장기적인 성장을 도모하는 교육을 이뤄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교육부 장관의 발언은 그 출발점으로 큰 의미가 있습니다.
다만, 절대평가제가 그 취지와 목적에 맞게 시행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정책적 노력이 뒤따라야만 합니다.
첫째, 채점의 신뢰성을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합니다. 1995년 5·31 교육개혁의 실수를 우리 사회는 아직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도 비교육적인 경쟁 풍토를 해결하고 공교육을 정상화하기 위해 절대평가가 도입되었지만, 각 학교의 ‘내신 부풀리기’ 성행으로 인해 학교 내신을 신뢰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었고 결과적으로 고교 내신에 대한 불신 현상이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교육부가 ‘채점 시스템’에 대한 정책안을 정밀하게 수립해 나가야만 합니다. 채점의 신뢰성을 담보해야 하는 책임을 개개인의 교사에게 짐 지우기보다는 ‘지역별 평가관리센터(가칭)’와 같은 채점의 시스템화로 평가의 신뢰성을 담보하는 세심한 정책적 설계가 필요합니다.
둘째, 절대평가제를 내신을 넘어 대학입학시험까지 일관성 있게 적용해 나가야만 합니다. 프랑스 바칼로레아, 영국 A-레벨, 독일 아비투어, 핀란드 일리오필라스툿킨토 등 교육 선진국 대부분은 내신만이 아니라 대학입학자격시험에도 절대평가제를 일관성 있게 시행해 가고 있습니다. 앞서 교육부 장관은 2~3학년 단계에서는 절대평가, 1학년 단계에서만 상대평가를 하는 것이 비정상적이라고 지적한 바 있는데, 마찬가지로 대학입학시험 역시 고교교육 단계의 마지막 평가인 만큼 일관된 정책 논리 아래 절대평가제를 적용해 가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때문에 2028 대입제도 개편에서는 이를 적극 고려해야 합니다.
셋째, 자사고·외고·국제고의 일반고 전환을 통해 고교 절대평가제 시행의 걸림돌을 제거해야 합니다. 절대평가제로의 전환은 고교 다양화(서열화)를 탈피한 교육과정 다양화로 완성될 수 있습니다. 지난 2011년 교육과학기술부는 ‘중등학교 학사관리 선진화 방안’을 통해 서술형 평가 및 수행평가 개선, 고교 성취평가제(절대평가제) 등을 도입하겠다고 발표했지만, 고교 내신 성취평가제는 결국 도입되지 못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고교체제 서열화 때문이었습니다. 입학사정관제 도입 논란과 함께 우수 학생을 선점한 특목고·자사고의 내신 불리함을 해결하기 위해, 고교 성취평가제를 도입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이 쟁점은 2022년 현재에도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절대평가가 도입될 경우 대학이 특목고·자사고를 우대할 것이며 이로 인해 고등학교 입시에서 특권학교들로 쏠림이 가중될 것이라는 문제입니다. 때문에 온전한 절대평가제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고교 서열화를 탈피해야만 합니다. 다행이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2011년에는 없었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주어져 있습니다. 바로 ‘고교학점제’입니다. 2021년 2월에 교육부가 발표한 ‘고교학점제 종합 추진계획’에 따르면 이제는 ‘학교 유형의 다양화가 학교 서열화로 이어지는 한계를 넘어서서, 학생 개개인의 교육 수요에 부응하는 수평적 다양화 구현’하는 것이라고 그 방향을 명시합니다. 이주호 교육부장관이 중요시한 ‘평준화를 넘어 다양화로’라는 가치가 그 속에 이미 내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다양화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특목고·자사고라는 계급적 고교체제를 유지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대한민국 모든 고등학교에 다양화 교육을 실현할 수 있는 방안이 이제는 마련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주호 장관은 자사고, 특목고를 존속시켜 고교 서열 체제를 유지할 생각을 버리고, 고교 성취평가제의 온전한 시행의 걸림돌을 제거하는 일을 조속히 추진해야 할 것입니다.
교육부는 위에서 언급한 정책적 노력과 함께 고교내신 절대평가를 실시해 살인적인 경쟁교육을 종식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배움을 통한 성장이라는 교육의 가치가 미래세대에게 구현될 수 있는 초중고 교육 환경을 조성해야 합니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과 좋은교사운동은 교육부가 절대평가의 교육적 가치를 실천적 의지를 가지고 정책으로 구현하려고 할 때 협력과 지지를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